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의 봄 (문단 편집) ==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에서 거리로 == 학원 민주화 투쟁 와중인 4월 9일에 [[성균관대학교]]에서 '병영집체훈련 거부 사건'이 일어났다. 유신정권 시기부터 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들어가 열흘간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박정희가 죽고 민주화 바람이 불자 학생들은 당연히 이 불합리한 훈련에 반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병영집체훈련의 폐지를 요구하는 농성과 시위가 다음 입소 차례였던 [[서울대학교|서울대]]와 [[서강대학교|서강대]] 등 여러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5월 2일에는 서울대에선 개교 이래 최대 인원인 1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그 전날 총학생회 운영위원회가 병영집체훈련 반대 투쟁을 철회하는 대신 '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하기로 결정한 데에 대해 격렬한 찬반 토론을 벌였다. 학생들은 "더 큰 걸 얻기 위해 작은 걸 버리자"는 총학생회의 결정을 따랐다. 그날 서울대 비상학생총회는 신군부와 유신잔당의 수장으로 지목된 전두환과 [[신현확]]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화형식을 치르는 등 본격적으로 정치투쟁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이와 같은 정치투쟁 노선은 다른 대학에서도 받아들여졌고, 다음 날인 3일에는 각 대학 총학생회가 대학 간 공식적인 연대방안을 모색한 뒤 9일에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전국 23대 대학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계엄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면서 관제언론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항간에 유포된 '대학생들의 5.15 총궐기설'이 신군부의 쿠데타 구실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당분간은 교내 시위만 계속 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원칙은 12일 서울대에서 열린 제2차 회의에서도 재확인되었다. 그런데 총학생회장의 이와 같은 결정을 뒤집어엎게 만든 건 바로 '5.12 군부 쿠데타설 사건'이었다. 신군부의 공작이 개입된 것인지 쿠데타설은 꽤 그럴싸했고, 이를 믿은 총학생회장단은 그날 밤 농성장의 학생들에게 몸을 피하라는 연락까지 취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간 온건노선을 지향하던 총학생회의 주류측은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와중에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은 "정부에서 안개 정국을 해결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실력 행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라며 [[5월 13일]]을 그 한계로 못박았다. 의도한 발언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학생회의 이 발언은 곧 전 대학으로 퍼졌고 예정된 날 [[연세대학교|연대]]생을 주축으로 한 서울시내 6개 대학생 2천 5백명이 캠퍼스를 벗어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야간에 가두시위를 벌였고 [[고려대학교|고려대]] 등 서울시내 7개 대학이 철야 농성에 들어가 투쟁은 학생과 신군부 간의 전면전으로 바뀌었다. 이때 학생들은 거리에서 최규하와 신현확, 전두환의 화형식을 벌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